1. 훈민정음 창제의 역사적 배경
조선 세종(재위 1418~1450)은 백성이 쉽게 글을 배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도록 1443년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1446년에 반포했습니다. 하지만 세종의 혁신적인 시도는 당시 지배층과 일부 학자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단순히 ‘새로운 글자 체계’ 문제를 넘어 정치·사회·문화적 갈등이 얽혀 있었던 것이죠.
2. 집현전 학자들의 반대 논리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한 세력은 주로 집현전 학자들과 성리학적 명분을 중시한 관료들이었습니다. 대표적인 반대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 중국 중심 질서(화이질서) 위협
조선은 명나라의 책봉 체제 속에서 존립했기 때문에, 중국의 문자인 한자를 버리고 새로운 문자를 쓰는 것은 ‘오랑캐의 행위’로 비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습니다. - 기존 지배층 권위 약화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계층은 양반·사대부였는데, 한글이 보급되면 평민과 여성도 쉽게 글을 배우게 됩니다. 이는 곧 지식 독점의 붕괴를 의미했고, 기득권층의 반발로 이어졌습니다. - 실용성에 대한 회의
일부 학자들은 “이미 한자가 있는데 굳이 새로운 문자를 만들 필요가 있는가”라며 한글을 ‘잡스러운 문자(언문)’라고 폄하했습니다.
3. 대표적 반대 사례: 최만리의 상소
훈민정음 반대의 상징적 사건은 집현전 학자 최만리의 상소입니다. 그는 훈민정음 창제를 두고 세종에게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며 반대했습니다.
- 명나라의 시각을 고려해야 한다: “중국의 글자를 버리고 우리만의 문자를 사용하면 명나라가 오랑캐 취급할 수 있다.”
- 불필요한 제도: “한자를 쓰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새 문자를 만들면 혼란만 생긴다.”
- 백성 교화의 본질 왜곡: “문자는 본래 성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중요한데, 새 문자를 창제하면 유학적 도리를 해친다.”
세종은 이에 대해 “내 백성이 글을 몰라서 억울함을 하소연하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반박했습니다. 즉, 훈민정음은 백성을 위한 글자라는 철학을 강하게 주장한 것입니다.
4. 논쟁의 성격: 학문인가 정치인가
훈민정음 반대 논쟁은 단순한 학문적 의견 차이가 아니었습니다.
- 정치적 성격: 집현전 학자들은 세종의 뜻에 반기를 들었다는 점에서 정치적 리스크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리학적 명분과 사대주의적 가치관을 지키려는 입장이 강했습니다.
- 사회적 성격: 문자 보급이 사회 구조 자체를 바꿀 수 있다는 두려움이 깔려 있었습니다. 글을 쉽게 배우는 평민이 늘어나면, 양반 중심 질서가 흔들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훈민정음 창제를 둘러싼 반발은 문화적 보수성과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물린 저항이었습니다.
5. 세종의 대응과 집현전의 분열
세종은 반대를 무릅쓰고 훈민정음을 완성했지만, 집현전 내부에서는 큰 갈등이 있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세종을 지지했으나, 다수는 침묵하거나 반대 입장을 유지했습니다. 최만리를 비롯한 일부 학자들은 강경히 반대하다가 이후 정치적 불이익을 받기도 했습니다.
세종은 반대 의견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논쟁 과정을 기록하고 후세에 남겼습니다. 이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단순한 ‘새 문자’가 아니라 백성의 권리와 국가의 자주성을 지키는 도구로 인식했음을 보여줍니다.
6. 반대 속에서도 퍼져나간 한글
비록 반대가 거셌지만, 훈민정음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성, 불교계, 하층민을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한글은 특히 편지, 소설, 불경 번역 등에서 큰 역할을 했습니다. 초기에는 ‘언문’이라 불리며 홀대받았지만, 결국 조선 후기에 이르러 민족 문자의 위상을 확립했습니다.
7. 오늘날의 의미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반대 논쟁은 오늘날에도 시사점을 줍니다. 새로운 제도나 기술이 등장할 때, 기존 권위와 이익 구조를 위협하면 항상 반발이 따릅니다. 그러나 세종의 철학처럼 ‘백성을 위한 길’이라는 대의가 있다면, 시간이 지나 결국 역사적 가치는 인정받게 됩니다.
결론
훈민정음 창제 당시 집현전 학자들의 반대는 단순한 의견 충돌이 아니라 정치·사회·문화적 저항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백성을 위한 문자’라는 뚜렷한 비전을 가지고 이를 밀어붙였고, 그 결과 오늘날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문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훈민정음 반대 논쟁은 혁신과 보수, 대의와 기득권의 충돌이라는 보편적 역사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